플레잉코치 출신 감독만 3명 정우람에겐 좋은 롤모델들이 있다
플레잉코치 출신 감독만 3명 정우람에겐 좋은 롤모델들이 있다
류현진 김하성 이정후와 뜨거운 LG 우승 현장 지켜봤다
KBO리그 투수 역대 최초로 1000경기 출장 기록을 세운 지난달 2일 대전 NC전에서 정우람(38·한화)은 덕아웃에 앉아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눈물을 훔쳤다.
2004년 프로 데뷔 후 20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흐르자 울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우람은 은퇴를 진지하게 고민 중이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그는 “시즌이 거의 끝나가고 있으니 고민해봐야 한다.
지금은 선수이니 선수를 더 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내년부터 내 자리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어디 뼈가 부러지지 않는 이상 선수로서 1경기라도 더 나가고 싶은 마음이 제일 크다.
구단과 상의하고, 가족들과도 이야기를 해봐야 할 부분이다”며 복잡한 마음을 보였다.
1000경기 대기록을 달성한 뒤 그동안 함께한 야구 선후배들로부터 축하 연락을 받으면서 정우람은 현역 연장에 대한 의지가 더 커졌다.
“단 1%라도 유니폼 입고 싶은 마음 있으면 포기하지 말라.
너라면 떳떳해도 된다”는 응원 메시지들을 보곤 현역 연장 의지를 굳혔다.
정우람은 “7~8월에 은퇴 고민을 많이 했다.
좋을 때 그만하는 것도 좋지만 잘리지 않는 이상 유니폼 입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나중을 생각하면 후회가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했다.
정우람의 현역 의지는 컸지만 한화 구단의 생각도 중요했다.
젊은 선수들의 비중이 계속 높아지는 팀 구성상 정우람에게 더는 1군에서 많은 기회를 부여하기 어려웠다.
정우람의 공도 예전 같이 날카롭지 않아 구단으로서도 그의 거취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정우람이 보직에 연연하지 않고 도전 의사를 나타내자 한화는 예우를 갖춰 ‘플레잉코치’라는 묘수를 꺼냈다.
선수 생활 내내 보여준 성실함과 리더십으로 팀 내 후배들 사시에서 신망이 두터운 정우람의 지도자 자질을 높이 평가했기에 할 수 있는 제안이었다.
정우람도 심사숙고 끝에 구단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동행을 이어가게 됐다.
내년 시즌 잔류군 투수 파트를 맡으면서 코치와 선수를 병행한다.
선수 신분을 유지하는 플레잉코치는 KBO리그에서 꽤 있었다.
그동안 사례를 보면 선수보다 코치에 비중이 더 실린다.
선수 생활 끝자락에 예비 전력으로 대기하지만 지도자 준비를 위한 과정에 가까웠다.
1989년 롯데 내야수 김용희, 2001년 두산 포수 김태형, 2011년 SK 투수 김원형 등 플레잉코치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뒤 지도자로 나서 1군 감독 자리까지 오른 인물만 3명이다.
2009년 한화 정민철도 시즌 중 플레잉코치로 은퇴한 뒤 같은 팀에서 코치에 이어 단장까지 지냈다.
플레잉코치가 꼭 전력 외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우람은 여전히 선수로서 팀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 크고, 플레잉코치가 1군 전력이 된 케이스도 여럿 있다.
이들이 지금 당장 정우람에게 가장 좋은 롤모델이라 할 만하다.
‘컨트롤 마술사’라고 불린 이상군은 1996년 한화에서 은퇴한 뒤 같은 팀에서 지도자로 나섰지만 1999년 플레잉코치로 현역 복귀했다.
그해 30경기(3선발·57이닝) 5승5패1세이브 평균자책점 4.42로 불펜에 힘을 보태며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2000년 통산 100승을 달성했고, 2001년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며 코치로 돌아갔다.
2004년 한화에서 플레잉코치가 된 투수 지연규도 2005년 마무리를 맡아 33경기(38이닝) 1패20세이브 평균자책점 2.84로 깜짝 활약했다.
36살 나이에 첫 올스타에 뽑혀 유망주 시절 꽃피우지 못한 잠재력을 뒤늦게 뽐냈다.
2006년이 라스트 시즌이었는데 그해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4이닝 1피안타 5탈삼진 무실점 호투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